A Plate : 나와 다른 당신에게 건네는

Unui Jang solo exhibition

장은의 개인전

2019.5.10 - 6.14 / 11am-7pm *월요일 closed

opening reception_ 2019.5.10(Fri) 6pm
artist talk_ 2019.5.25(Sat) 3pm
artist workshop_2019.5.24(Fri) & 5.25(Sat)
@ThisWeekendRoom
Curated by ThisWeekendRoom
Supported by Seoul Foundation for Arts & Culture, Korea Arts Management Service

디스위켄드룸은 5월 10일부터 6월 14일까지 장은의 작가의 개인전 <A Plate : 나와 다른 당신에게 건네는>을 개최한다.

장은의 작가는 인간 존재의 현실과 환상의 간극을 탐구하고, 작가 특유의 회화 체계에 따라 서로 다른 세계의 내면적 관계를 시적 언어로 그리는 작업을 해 왔다. 이번 전시에서는 지난 2017년과 2018년, 작가가 두 해에 걸쳐 독일의 작은 도시에서 레지던시 입주작가로 생활하며 그곳의 사람들과 환경에서 영감을 얻어 그린 <두 개의 원> 연작을 포함하여, 도시로 돌아와 일상과 시간의 느슨한 틈을 내 회화적 변주를 전개한 신작들을 선보인다.

작가가 그린 그릇 안에 놓여진 올통볼통한 토마토, 포도, 사과 등의 자연물은 인공과 자연과 같이 서로 다른 두 세계의 공존을 상징하는 것으로 사람 사이의 관계에 관한 이야기의 투사이다. 하나의 작품에 많은 이야기를 담기보다는 수평적 나열을 통해 경쾌하게 생산한 형식의 신작들을 두고 ‘이것은 토마토가 아니다’라고 발언하는 작가는 관객에게 이미지의 배반과 동시에 가벼운 스타일의 회화에 함축된 중의적 이야기를 전한다.

또한 전시장 한 편에 작가의 작업실과 같이 연출한 커뮤니티 공간에서는 아티스트 토크와 관객이 작가의 작업 과정을 직접 체험할 수 있는 워크숍 프로그램 등을 진행하며 관객과 보다 가깝고 친근하게 소통을 시도한다.

about Artist

미술작가 장은의는 이화여자대학교에서 서양화를, 함부르크 조형예술학교에서 순수예술을 전공하였다. 2013년 개인전 <진정한 사랑>(예술공간 플라즈마, 서울)을 시작으로 갤러리 조선, 갤러리 플래닛, 창성동 실험실, 독일 하우스 데어 쿤스트 에니거 Haus der Kunst Enniger 등에서 개인전을 열었고, 경기창작센터와 팔복예술공장, 독일 Künstlerhaus im Schlossgarten과 Haus der Kunst Enniger의 입주작가로 활동했으며, 현재는 화이트블럭 창작스튜디오의 입주작가로 활동 중이다.

이것은 토마토가 아니다

글 | 고연수(평론)

저게 저절로 붉어질 리는 없다

저 안에 태풍 몇 개

저 안에 천둥 몇 개

저 안에 벼락 몇 개

여행이 좋은 이유는 일상에 지쳤을 때 한 숨 고르게 한 뒤 삶에 활력을 불어 넣어 준다거나, 중대한 고민이나 정리를 해야 할 것이 있을 때 환기시켜주기도, 여행 중 맞닥뜨린 어느 한 순간이 인생의 방향과 속도를 바꿔놓는 신비한 경험의 가능성도 있는 일종의 아우라를 체험할 수 있기 때문 아닐까. 그리고 갑자기 멈추기도 하고 때론 속절없이 흘러가버리는 시간 앞에 인간으로서의 무능이 불현듯 매우 큰 슬픔으로 느껴질 때 그 속도를 뒤섞어 주거나 유쾌한 혼란에 빠지게 하는 마술을 부려주기도 한다. 실은, 시간과 일상의 체감 속도를 좌지우지 컨트롤하는 듯 한 그 마술적 행위는 예술창작자들이 우리에게 다각적으로 근사하게 보여주었던 아우라였지 않은가.

< Three Circles 15(Two tomatoes and a bowl) >, 73x53cm, Oil on canvas, 2019
ⓒ 2019 Unui Jang
< Three Circles 14 (Two tomatoes and a wine glass) >, 73x53cm, Oil on canvas, 2019
ⓒ 2019 Unui Jang

첫 만남 : 재현의 유희

장은의 작가와의 첫 만남에서 대뜸 재현의 의미를 물었다. 시각예술에서는 생경하지 않은 클래식한 화두일지라도 사실 창작자에게 무턱대고 언어로 답을 요구하는 것은 무례한 일일 수도 있다. 어떤 방식으로든 감각을 깨워주는 작품을 구현해내는 창작자들이지 재현이란 문제를 분석하는 이들은 아니기에. 설치작업으로 구성된 2013년의 첫 개인전이 마무리하는 전시였다고 말하는 작가의 의중이 사뭇 궁금하기도 했고, 이후 작가의 잔잔한 서사적 흐름대로 부드럽지만 고집스럽게 고수하고 있는 평면작업들도 예사롭게 보이지는 않았다. 유하게 보이는데 완고하게 느껴지는 것은 사실 필자의 또 다른 편견일 수 있다는 것을 일단 고백한다. 부드럽게 잔잔한 것은 유연하기도 쉽다는 일종의 강박일수도. 실제 작가가 준비해 온 작품 이미지들을 빠르게 훑어 보았을 때 작업들이 하나처럼 보였던 느낌이 강했던 나름의 이유가 가장 컸고, 외출시 무얼 놓고 나온듯한 찜찜함과 비슷한 느낌으로 다시 이미지를 천천히 되짚어보며 건넨 필자의 첫 질문이었기도 했다. 작가는 잠시 생각한 후 ‘유희’라고 답했다. 한 숨 돌린 뒤 작가의 입에 담긴 유희는 그래서 오히려 단호한 어조로 다가왔다. 2014년부터 일관된 톤으로 그려진 일상적인 풍경화와 2017년부터 시작된 과일 시리즈의 작품들에서는 그려지는 대상의 모습이 작가가 의도한 전부는 아닐뿐더러 어쩌면 보여지는 시선의 일부 방식이고, 그 이면에 마련해 놓은 작가의 의도된 큰 공간이 있을 수 있다는 점이 서서히 직감되었다. 작가 자신이 지닌 감각과 소소한 일상의 소중함에 대한 신뢰가 그가 무장하고 있는, 소박하지만 강한 무기처럼 보였다. 그래서 일관된 톤으로 나열된 작품들을 가쁘게 쭉 훑고서 의아한 느낌(?)으로 다시 소급해 본 필자의 행위 연유도 해소되고 있었다. 무언가 굉장하게 특별한 것이 있을 것이라는 밑도 끝도 없는 막연한 기대는 필자도 어쩔 수 없이 학습되어진 예술을 마주하면 튕겨나오는 심미적 습관이고, 사실 작가입장에서도 밑질 게 없는 자신의 작업을 마주한 자들에게서 되돌려 받을 수 있는 감흥일 것이다. 작가가 만들어 놓은 시각적 모호함 속을 무얼 찾겠다고 헤집어 들어가 보는 적극적 감상태도는 작가를 또한 즐겁게 하는 그가 명확히 계획한 의도이진 않을까. 양자 간 등가적 상황에서의 상식적 감각들의 추돌과 마찰, 그리고 공감과 발견의 그 공간이 작가가 말하는 그 유희일지도.

두 번째 만남 : 일상의 유희

그래서 작가는 작업에서 무심하게 흐르는 듯 보이는 일상을 낯설게 보이도록 장치를 심어놓는다. 같은 톤으로 흘러가는 일상은 오히려 굴곡 있는 우리의 실제 삶보다, 아니 매우 이질적으로 단조롭다. 작가의 고백대로 하나의 작품에 많은 이야기를 담아 쌓여진 내공을 실타래 풀 듯 집중해야하는 것이 아닌 수평적 나열을 통해 생성ㆍ분열ㆍ분화하는 형식이다. 근래에 작가에게 선택된 일상의 모습은 과일이다. 마치 케이터링에 한 줌 예쁜 핑거푸드들이 동일한 모양이지만 빠르게 소모되면서 맛의 감각과 느낌은 각개 차이가 드러나는 과정과 흡사한 느낌이다. 에너지와 물질을 한 곳에 집중하여 그득 담은, 시각예술에서 묵직하게 여겨왔던 그 가치를 작가는 조금 우회하려는 듯 싶다. 하나의 작품이 지닌 아우라 대신 반복되는 듯 보이지만 하나도 같지 않은 한결같은 작품들이 지닌 감각의 차이로서의 아우라를 우리에게 부드럽게 투사하고 있는 것이다. 일상을 일상처럼 보이고 싶은데 일상적으로만 보이기 싫은 것이라고 할까.

따스한 봄 날 좋은 볕을 한가득 품고 있는 작가의 작업실에서 하나하나 줄지어져 허공에 떠 있는-그릇에 놓여져 있는 과일작품들이 일렬로 벽에 세워져 있기에 느껴지는 착시-과일들 속에서 작가가 부드럽지만 단호하게 뱉은 “그래서 이것은 과일이 아니에요”라는 말에 어렴풋 예상했던 예술가적 발언임에도 여지없이 알싸한 이미지의 배반을, 일상의 배반을 느낀다. 우리가 예술창작자들로부터 종종 받았던-그들에게는 유희라고 말해지는, 우리에게는 크게 당혹스러운-이미지 감각의 타격을.

시지각으로 감지된 형상과 빛깔은 우리가 살아오면서 쌓아온 경험과 본능에 의해 마음과 머리를 분주하게 오가며 재구축ㆍ재조합ㆍ재구성하여 새로이 일깨워지는 감흥을 만끽하며 시각예술을 맞이한다. 작가와의 긴 시간 진한 만남을 통해 물론 토마토가 그려진 그림을 보며 그것은 토마토가 아님을 인지해야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과즙이 터질듯 투명하게 익은, 자연의 사연을 모두 안은 채 올통볼통한 형태로 놓여진 영락없는 토마토 형상으로 투영된다. 과일 작품들에서 관객이 느끼고 해석하는 게 참 재미있다고 말하는 작가의 흐뭇한 표정에 오히려 토마토와 작가의 모습이 중첩된다. 작은 존재가 자연의 영향을 온몸으로 고스란히 받아 색과 형태를 만들어가는 연약하고도 강인한 모습으로 말이다. 한국과 독일을 오가며 같은 작업을 진행해도 한국에서는 좀 더 목소리가 커지는 것 같다는 작가의 말은 곧 주변과 그 반응에 쉽게 영향을 받는 작가의 성향으로도 보인다. 인공적인 완벽한 형태의 그릇들 안에 놓여졌기에 자연이 빚은 다양한 빛과 형태의 과일들은 하나도 같지 않고 각자가 더욱 고유하게 보일 수 있는 것처럼. 그렇게 작가는 일상과 시간을 늘려 작가 본인 뿐 아니라 관객 역시 그 틈으로 들어와 주기를 희망하는 듯 보인다.

필자는 작가에게 되묻고 싶어진다. 잔잔한 일상과 소소함의 소중함을 작가의 호흡과 숨결로 느끼고 그 의도에 응답했으니, 그 다음은 무엇일지. 한 곳으로의 침잠과 깊은 몰입이 아닌 사뿐한 나열의 형식에 작가의 시각적 호흡을 맞춰 편히 쫒고 있는데, 곧 또 다른 편집되는 일상의 소소한 편린들을 과일 형상 후에는 어떤 모습으로 펼쳐질지 이상하리만큼 느긋하게는 기다려지지 않는다. 이 왠지 모를 모호한 조급함은 작가에게 향한 재촉이라기 보다는 시각예술이 그간 우리에게 선사해 주었던 스펙터클이란 것이 말초적 쾌감을 자극했든 심연의 본성을 건드렸든 여하튼 놀랍도록 충분히 만족시켜주었기에 길들어진 성향이라고 항변하고 싶다. 그리고, 물질로만 치자면 평면시각예술은 벽면에 얌전히 걸려만 있으면서도 그것이 지닌 한계를 넘어 능력이상 초월적인 힘을 늘 번듯하게 보여주지 않았던가.

이제, 서두에 슬며시 띄어 놓은 한 구절의 아름다운 시에 맺음을 해야 할 듯하다. 이것은 역시 대추만은 아닌 듯 싶다. 장은의 작가의 작품들에 놓여진 토마토 아닌 토마토 형상에 여전히 여러 유희적 상념은 놓여진다.

저게 저 혼자 둥글어질 리는 없다

저 안에 무서리 내리는 몇 밤

저 안에 땡볕 두어 달

저 안에 초승달 몇 날

 

장석주, 『붉디 붉은 호랑이』, 「대추 한 알」

나와 당신의 공존을 위한 포스트-회화적 제안

장은의의 <원> 연작을 중심으로

글 | 양효실(평론)

(다시)읽기로서의 보기

2017년 이후 장은의 작가는 그릇에 놓인 과일, 열매를 재현하는 회화를 만들고 있다. 샴페인 잔, 와인 잔, 접시, 보울, 워머 등등의 그릇과 포도알, 사과, 가든 토마토, 살구 등등의 과일-열매가 주된 오브제로 등장한다. 화면은 위에서 수직으로 내려다보면서 피사체를 클로즈업해 찍은 사진 구성을 따른다. 이것은 회화이지만 명도 채도 밀도 구조와 같이 흔히 회화적 화면 구성에서 거론되는 주요 개념들은 거의 실현되지 않는다. 마치 ‘덜(less)’ 만들기가 전략인 듯 평이하고 단순한 정물화이며, 복잡한 트릭이나 암시적 장치가 없는 구도이고, 그릇에 담긴 과일-열매라는 시각적 패턴의 무한한 나열이고, 선택된 그릇과 과일의 관계로부터 유추할 알레고리적 의도도 강렬한 서정도 모호한 정동도 없는 회화이다. 밋밋하고 담백하다. 관객을 사로잡는 구성이나 단서, 풀어야할 수수께끼가 부재하기에 그저 무심한 보기로 충분한 이런 구성은, 그러나 캡션(제목) 덕분에/때문에 회화의 일환이 아니라 회화‘에 대한’ 메타적 인용으로 바뀐다. 가령 <두개의 원(살구와 접시)>이나 <열여섯 개의 원(열다섯 개의 포도와 접시)>와 같은 제목은 시각적 이미지와 언어적 읽기 ‘사이’(의 존재)를 개방하게 된다. 우선 즉물적인, 재현적인 이미지를 보는 관습은 괄호 안의 제목에 의해 유지된다. 살구와 접시, 포도와 접시를 그렸다. 그러나 작가는 포도나 살구와 접시, 즉 과일과 그릇의 유적(generic) 차이를 표식하되(mark), 접시 안에 담긴 포도 알 15개 하나하나를 세도록 요구하는 이상한 읽기를 제목에 집어넣음으로써 예의 관습적인 정물 보기를 슬쩍 건너뛴다. 괄호 안의 제목은 문화적 기호들, 지시적 기능을 담당한 기표들로 이루어지지만, 그 기호들은 작가의 이상한 호명방식에 의해 ‘주관적’ 프레임으로 건너가 있다. 다음으로 이런 괄호 속 제목(의 생경함)보다 더 앞을 차지하는, 보편성(혹은 동일성?)을 표식한 제목인 ‘2개의 원’이나 ‘16개의 원’과 같은 제목은 첫 번째 보기/읽기의 문화적 일반성을 슬쩍 밀쳐내면서 환원적인, 관념적인, 형식적인 (재)구성의 단계로 이동한다. 재현적 예술은 대체로 일상적 지각방식이나 문화적 반응방식을 따르면서 선택적 클로즈업이나 ‘기계적’ 모방을 통해 현실과 예술의 연속성이나 차이를 도모한다. 그리고 작품의 제목은 회화로서 읽히는 것을 현실로서 보이는 것으로 환원하면서 지시적, 기호적 반응을 보충/보완한다. 장은의는 그런 제목의 기능에 괄호를 쳤다. 작가는 재현적 회화의 관습에 괄호를 침으로써, 그것을 부차적인 것으로 만듦으로써 자신의 지시적 회화를 다른 차원으로 전치시킨다. 추상적 관념 혹은 형이상학적 이념으로서의 원은 각 사물들, 이미지들의 구체성이나 일상성을 그것들의 원본, 최종심급으로 되돌림으로써 가시적인 것들의 차이나 다양성을 극복하려 한다. 살구나 접시 혹은 포도와 같은 차이는 원이라는 동일성에 의해 사상된다. 동일성에 저항하는, 차이를 음미하는 예외적인 장으로서의 회화라는 관습은 두 개의 원, 열여섯 개의 원과 같은 수학적이고 기하학적인 보기에 의해 부차적인 것으로 밀려난다. 구체와 특수를 이상하게 표식하는 괄호 안의 제목과 일반과 보편을 표식하는 일반 제목, 흔히 상호배제적인 관습을 공존하게 만든 제목의 낯섬 때문에, 예의 구상과 추상의 대립을 (재)가시화하는 이상한 병치로 인해 이 단순하고 밋밋하고 담백한 그림은 모호하고 불안하고 기이한 떨림을 함축하게 된다. 긴장이나 불안, 그러므로 힘이 미약하게 존재하는 것이다. 또 타원에 가까운 포도 알도 원으로 환원되기에 이 역시 작가의 주관적 읽기/보기를 경유했음을 알 수 있다. 작가는 사회적, 집단적 기호에 근거한 읽기나 안정화 관습을 거의 알아채지 못하게 슬쩍 움직이고 있다- 어떤 것도 제 자리에 잘 있지 못한다. 그릇-문화(심지어 워머는 이곳 한국인들에게는 아직 낯선 유럽의 그릇이다)와 열매-자연의 익숙한 대조는 여기서 중요하지 않은 듯 하고, 수학적 관념이나 영원한 이데아로서의 원은 엉성한 원들, 비뚤어진 원들, 제대로 그려지지 않은 원들 때문에 ‘시적’ 다의성으로 전치되어 있고, 15개의 포도알과 한 개의 접시가 ‘16개의 원’으로 평등화, 동일시되는 데서 알 수 있듯이 장은의 작가가 제안하는 차이와 동일성의 도식은 주관적이고 개성적이다. 위에서 내려다 본 정물의 구도가 비일상적이듯이, 워머에 놓인 사과는 일견 ‘초’현실적인 느낌으로 다가오고, 제목과 화면의 병치(포섭이나 보충이 아니기에) 역시 그렇다. 당신은 이렇게 쉽고 밋밋한 회화를 천천히 찬찬히 뜯어보아야 한다. 이것은 대놓고 내기를 제안하는 퍼즐이나 게임은 아니다. 이렇듯 비일상적인 비관습적인 배치나 읽기에 대한 것인 이 회화를 우리는 포스트-회화나 메타-회화라고 불러야 하지 않을까? 장은의의 회화는 우리를 ‘안’으로 끌어들여 감상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안과 밖, 동일성과 차이, 관습과 질문-성찰 사이를 거처로 삼은 움직임이기 때문이다. 이토록 단순하고 자명한 그림, 밋밋하게 그려져서 깊이나 물성, 제스쳐로서의 회화를 간단히 물리치고 있는 이 덜 그려진 그림은 감상, 관조, 집중, 예외적 경험으로서의 회화에 대한 관습적 태도에 슬그머니 괄호를 치고 있기(나는 거부라는 말을 삼가고 있다. 그녀의 그림이 그렇게 가시적으로 단도직입적으로 회화를 의심하고 있지 않아서이다)에, 회화의 관습 혹은 이데올로기를 구성하는 그 모든 전제를 가시화하면서 우리에게 회화에 대한 질문을 제기하는 것 같다. 그릇에 놓인 과일이라는 너무나 평범한 이미지는 일상을 비일상적인 것으로, 일종의 사건으로 (재)경험하게 만드는 예술-회화의 특수성을 충실히 따르고 있지만, 동시에 그 특수성에 괄호를 치는 작가의 독특한 스타일 때문에 온전히 회화로서 감상되지는 못하게 된다. 눈에 보이는 모든 사물들, 오브제들에서 형태학적 동일성을 추출하는, 그런 집중과 동일시를 위해 일상적 맥락을 제거한 이 정물, 이 회화, 이 편평한 그림 속 덜 그려진 오브제, 덜 그려진 원은 그렇기에 오브제의 객관성이나 기호성, 관념의 완전성도 충족시키지 못함으로써 오롯이 예술가의 주관성, 앞서 이야기한 것과 같은 일종의 ‘시적’ 환기성을 획득하게 된다. 예술은 미완성으로서, 시적 다의성으로서 일상과 과학, 철학 사이 어딘가에 자신의 자리를 보유한다. 동시에 작가의 회화는 회화의 반복이 아닌 회화에 대한 인용으로서, 주관적 자의식을 경유한 비평으로서 그 일회성을 보유한다. 더 그리고 더 채우고 더 만드는 전략, 완전성과 완성, 구도에 바쳐진 회화는 사실 지금으로서는 과거의 문화, 지배 문화이다. 수없이 덧칠한 바탕에 단단하게 올려진 오브제(사실 대부분의 오브제는 작가의 자아의 투사라는 것에 유념한다면)를 그리지 않음으로써, 회화를 희미하게 탈-색시킴으로써, 대문자 회화를 지움으로써 작가는 예술의 죽음 이후의 예술이라는 어정쩡한, 겨우 살아있는, 포스트적 존재들의 상태를 가시화한다. “여튼 페인팅이지만 가벼운 드로잉적인 느낌을 잃지 않으려” 한다는 작가의 언급은 선명하고 확실한 경계, 드로잉보다 우위를 점하면서 곧 ‘그 예술’이었던 회화를 지우는, 그럼으로써 예술을 덜 대단하고 더 사소한 것으로 재고하려는 동시대 시각 예술가의 자리를 드러낸다. 주지하다시피 장은의 작가는 영상, 설치를 하다가 2017년 이후 ‘회화’를 하고 있는 시각 예술가이다. 여러 장르, 매체, 기법을 구사하는 동시대 작가에게 회화는 유일한, 보편적인, 대문자 예술이 아님은 당연하다.

에피소드 – 모르지만 나와 닮은 당신과 나의 공존에 대한

<원> 시리즈는 장은의가 경험한 특별한 순간, 하나의 에피소드에 근거한다. 작가는 2017년 독일 레지던시에서 동독출신의 남성 작가와 콜라보 전시를 위해 공동거주를 했다. 언어, 인종, 젠더 등등 어떤 면에서도 공통점도 없는 타인과의 공동거주이자 콜라보 작업이었지만(당연히 힘들었을 것이다) 다른 쪽으로 가는 게 재능인 작가에게는 역시 그 상황도 “물 흐르듯 순조롭고 창조적인” 과정이었다고 한다. 어느 날 작가는 부엌 개수대에서 자신이 먹을 포도송이를 씻고 있었고 우연히 포도 한 알이 개수대 안에 놓여 있던 동독 작가의 와인 잔 속으로 퐁당 빠지는 일이 있었다. 그 순간 작가는 “조화로우면서도 긴장감이 느껴지고, 일상적이면서도 낯설음이 느껴지는” 경험을 한다(장은의의 말하기는 ‘사이’를 위한 말이다. 세 번 인용된 그녀의 말들이 모두 그렇다는 것을 당신은 이미 깨달았을 것이다. 모호하게 중간에 겹치는 곳에 머무르는 그녀의 재능 같은 것을). 위에서 내려다 본 와인 잔 속 포도 알 하나. 큰 원 속의 작은 원. 그릇과 열매 혹은 어떤 공통점도 없는 두 존재가 원으로서의 공통점을 드러내는 순간. 물론 그것은 위에서 내려다보는 특이한 시점이 없었으면, 그 상황을 미적 경험으로 전치시키는 작가의 태도가 없었으면 불가능했을 순간이다. 차이를 존중하고 환대하라는 동시대의 에토스는 맥락과 상황을 벗어나 있다는 점에서 ‘보편적’ 관념이고, 그렇기에 우리는 그것이 구체적인 일상, 특정한 상황에서 어떻게 구현되고 체화되는지, 그것이 어떤 경험을 유도하고 어떤 경험에서 일어나는지에 대해서는 사실 거의 알지 못한다. 배운 가치이고 체화되지 못하는 관념이고 떠도는 사실들이다. 장은의는 자신의 경험, 전달하자마자 곧 사소하고 평범해질 그 경험을 대신에 시각 언어로 번역했고 그것이 <원> 연작이다. 선진 서구에 도착한 동양의 작은 여성과 몰락과 박탈을 겪은 동독 남자라는 처지는 두 사람이 차이 속에서도 서로를 ‘인정’하는 상황이었을 것 이다. 작가는 이러한 차이의 공존을 번역할 이미지를 개수대에서 포착해낸다. 부시지 않은 그의 그릇으로 떨어진 나의 포도 알 하나가, 이 사소한 이어짐이 예술가의 시각적 이데아로서, 일상적 드로잉으로서, 회화적 구성으로서 (재)구성되었고 반복·확장되었다. 2017년 개인전 <두개의 원: 서로 다른 세계가 공존하는 어떤 방법>을 시작으로 2019년 디스위켄드룸에서 열린 전시 <나와 다른 당신에게 건네는>을 거쳐 앞으로의 작업에서도 타자와의 공존에 대한 포스트-회화적 제안은 계속될 것이다. 언뜻 보면 일상의 한 장면을 중립적으로 포착한 듯 보이지만 사실은 일상에서는 불가능한 장면이나 상황에 대한 인공적인 구성인 이 포스트-회화, 언뜻 보면 단순한 정물화이지만 공존이란 다원주의적 이념의 주관적이면서 시각적인 번역인 이 지적 구성 앞에서 그렇다고 우리는 진지해지거나 엄숙해지지 않아도 된다. 앞서 말했듯이 밋밋하고 담백한, 시선을 잡아 끌지 않는 그림이기 때문이다. 밋밋하고 담백한 진실, 생활에서 마주치는 진실은 극적인 사건으로서가 아닌 개수대 같은 시시한 장소에서 내려다보는 진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위대한 회화는 그런 진실을 담을 수 없음을, 드로잉으로 내려간 회화라는 장치를 통해 작가가 우리에게 슬쩍 제안한 게 된다.

포스트-회화

근대적 산물로서의 회화는 자신의 죽음 이후에도 여전히 살아서 자신의 포스트-근대적 정당성을 혹은 시대착오적 의의를 항변하거나 고지한다. 위대한 예술의 시대를 경험하고 싶은 사람들, 고가의 상품을 구경하고 싶은 사람들, 화가의 특권을 흠모하는 사람들이 여전히 미술관에서 회화를 찾는다. 시각 예술가에게 회화는 실험의 대상으로, 분석하고 해체하고 재전유하는 매체로서 전유된다. 그것이 담지했던 휴머니즘적 가치는 여전히 유효한지, 그것을 여전히 반복하는 게 그것의 과거의 영광에 대한 회고적 반추는 아닌지, 동시대 예술가는 과연 근대적 예술가에게 어떻게 경의를 표하면서 거리를 두어야 하는지, 예술로서의 회화가 아니라 예술들 중의 하나로서의 회화를 어떻게 표식 해야 하는지 고심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예술의 역사성은 단지 위대한 예술의 환상에 가리워져 보이지 않게 될 것이다. 장은의 작가가 언급하는 회화는 여전히 회화로 보일 수도, 포스트-회화로 읽힐 수도 있다. 그녀의 태도가 모호하기 때문이고, 그런 모호성은 그녀의 작업들이 중시하는 미적 가치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마치 포스트-휴머니즘이 근대적 휴머니즘과의 거리를 통해서 여전히 휴머니즘을 증언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래서 밋밋하고 담백한 회화, 동시대 다원주의의 가치(이념)를 회화적 이미지, 미적 구성, 혹은 시각적 장치를 통해 전달하려는 작가의 그림을 ‘사는/소장하는’ 사람들이 일반인들, 작가의 화면에서 자신의 사적이고 주관적인 이미지를 발견하는 사람들이라는 뒷이야기도 흥미롭다. 오늘날 예술은 여전히 미술관에서 전시됨으로써 근대적 맥락에 부착되어 있을 것이지만, 그것의 사회적 맥락이나 관객과의 관계는 알게 모르게 포스트-근대적으로 변형되었을 것이다. 사회적 맥락이나 기능 혹은 관심과의 거리를 전제로 미술관의 흰 벽에 걸리기로 가정되었던 이 회화를 보러오는 사람들에 의해, 그들 각자의 사소하고 다양한 이야기와의 ‘관계’를 경유해서 전시 이후의 삶, 여생을 살게 되기 때문이다. 회화의 보편성-환상에의 선망이 아닌, 자신의 주관적 이야기를 대입하고 싶은 시각적 단서로 활용하려고 사람들이 작가의 그림을 소장한다는 이야기가 내게 흥미롭다(만약 누가 묻는다면 내게는 워머의 사과가 그렇다. 도대체가 조화와는 전혀 거리가 있는 이 크고 어색한 둘의 공존이 내게는 많은 이야기를 대입하게 만드는, 내게서 이야기를 끌어올리는 단서이다). 내부로 수렴하고 환원하는 방식을 놓고 고심했던 근대는 둘(나와 너/당신) 보다는 하나에 대해, 내적 완전성과 자기 동일성을 위한 무대였다. 그리고 장은의의 포스트-회화는 나와 다른 너와 내가 공존하는 방식에 대한 시각적 이미지, 그러나 장은의라는 장소를 경유해서만 우리에게 도착할 메시지, 그렇지만 우리 모두가 각자의 이야기로서 써먹어도 좋은 이야기들을 위한 제안이다. 한 사람의 일회적이고 일화적인 장면이고 우리 각자가 ‘당신’ 때문에 처한 상황에 대한 것이고, 굳이 미술관을 방문하는 우리가 즐기는 예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