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채널

Heeuk Kim solo show
김희욱 개인전
2019.11.20 - 12.7 / 11am-7pm / *Monday closed
opening reception_ 2019.11.20(WED) 6pm
@ThisWeekendRoom
후원 서울문화재단

김희욱 개인전 <슬픔채널 Sadness Channel>이 2019년 11월 20일부터 12월 7일까지 디스위켄드룸에서 열린다. 작가는 2017년부터 ‘감성지능 시각실험실’ 프로젝트를 진행해오고 있다. 프로젝트는 감정 표현의 절제를 끊임없이 교육받고 요구받아온 우리들의 감정이 현재 어디에서 어떻게 작동하고 있는지 추적하며,  사람들이 가장 꺼리는 네 가지 감정 – 불안, 질투, 슬픔, 분노를 차례로 다룬다.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세 번째 열리는 이번 전시에서는 다섯 개의 신작 영상을 통해 사람들이 서로 다른 목적으로 슬픔이라는 감정을 이용하는 방식과 현대인들이 슬픔을 느끼고 다루는 내밀하고 개인적인 방식에 대해 이야기한다. 

about Artist

미술작가 김희욱(b.1985)은 한국예술종합학교 미술원에서 조형예술 예술사와 전문사를, 영국 왕립예술학교에서 조각과를 졸업했다. 2012년, 첫 개인전 <아쉬움의 발로>(플레이스막, 서울)를 시작으로 <픽션의 논픽션>(175갤러리, 서울, 2013년), <Camouflage 위장술>(공간413, 서울, 2017년)에 이어 2018년부터 2019년까지 소쇼룸(서울)과 플라즈마(서울)에서 감성지능 시각실험실 프로젝트 일환으로 개인전 <훔쳐보는 암살자 Part.1, 2>를 개최했다. 그밖에 <Essential Consuming>(Space E14BQ, 런던, 영국, 2017년), <더스크랩>(서울, 2016년) 등의 단체전에 참여하였다.

작가 노트(2019)

어떤이의 하루

아침에 일어나 SNS를 본다. 젊은 여배우의 사망 소식을 접한다. 슬퍼하며 동시에 분개하는 사람들. 출근길 최근 유행하는 가요들을 듣는다. 헤어진 연인들의 이야기가 80퍼센트. 지하철역 전광판에는 가족의 죽음, 나의 죽음을 이야기하는 보험 광고. “당신이 갑자기 죽으면 당신의 가족들은…?!” 회사 쉬는 시간 회사 동료의 지난주 휴가를 내고 다녀온 해외여행 이야기를 듣는다. 피곤하고 단조로웠던 나의 지난주를 떠올린다. 퇴근길 택시에서 들은 라디오 사연. 고아로 힘들게 자라온 친구의 친구에 대한 사연. 집에 와 티브이를 켜니 울고 있는 드라마의 여주인공. 드라마 한편이 끝날 때까지 울부짖는 장면 총 6회. 잠들기 전 핸드폰의 사진첩을 뒤적이다 옛날 사진들을 본다. 힘들지만 즐거웠던 작년 여름 태국 여행. 지금은 잃어버린 아끼던 목걸이를 하고 있는 재작년 겨울의 나. 모두 지웠다고 생각했지만 우연히 아직 남아있는 2년 전에 만났던 남자의 사진. 괜히 기분이 이상해져 사진첩을 닫고 유튜브의 코믹한 영상을 골라내어 보기 시작한다.

다양한 슬픔

슬픔이라는 감정을 생각해보자. 감정이라는 것이 대체로 그렇듯 슬픔이라는 것은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그것의 다양성의 층위가 계속해서 넓어진다. 사실 슬픔은 본래의 층위에 비해 다양성의 측면에서 상당히 평면적으로 인식되고 있다. 감정을 긍정적인 감정과 부정적인 감정으로 분류한다면 슬픔은 긍정적인 감정들 만큼 대중적이며 부정적인 감정들 중 가장 쉽게 공감을 살 수 있는 감정이다. 슬픔의 이러한 양면성을 생각하다 보면 인간의 심리라는 것이 꽤 변태적일 수 있다는 데까지 생각이 다다른다. 인간은 근본적인 슬픔은 지양하지만 단편적인 슬픔은 상당히 즐기는 편이라 슬픔을 기반해 만들어진 수많은 컨텐츠들을 끊임없이 소비한다. 이러한 컨텐츠들은 슬픔을 재료로 삼아 공감과 집단 위안의 장을 형성한다. 보통 이러한 컨텐츠들을 소비하는 심리 단계는 크게 두 가지로 나뉘는데, 슬픔을 소비하고 공감하여 물질적 소비 행위를 실천하는 단계, 혹은 슬픔을 소비하고 공감한 뒤 스스로에 대한 위안과 안도감을 느끼는 단계로 진행된다. 이러한 슬픔의 생산/소비 행위는 사적인 관계 안에서도 자주 일어난다. 슬픔은 보통 의심받는 경우가 드물고 스스로의 자아를 약한 상태로 보이게 만들어 상대방이 나보다 높은 위치에 있다는 순간적인 착각을 줄
수 있기 때문에 보통 부탁을 해야 하거나 상대방으로부터 미움을 받고 싶지 않을 때 자주 이용된다. 이렇듯 다양한 방식으로 생산, 소비되고 있는 ‘단편적 슬픔’과는 달리 ‘근본적 슬픔’은 만년 찬밥 신세이다. 이것은 가장 불편하고 피하고 싶은 무엇이다. 이것이 웅크리고 있는 사람의 마음에는 불안함과 산만함이 공존한다. 이것의 본질에 다다르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정신을 분산시킬 수 있는 어떤 것들을 필요로 한다. 하지만 근본적 슬픔은 그야말로 팔을 걷어붙이고 제 손으로 해결하지 않으면 항상 그곳에 있을 수밖에 없는 굳어 빠진 냉장고 구석 찬밥처럼 냄새를 풍기지도, 큰 자리를 차지하지도 않지만 항상 그곳에 있다. 미약하면서도 강력한 존재감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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