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을 건너고 나면, 뗏목을 버려라!

Seunghwan Ryu solo exhibition

류승환 개인전

2018.10.3(WED)-10.12(FRI)/ 1pm-7pm

opening reception_2018.10.3(WED) 3pm

@ThisWeekendRoom

Curated by ThisWeekendRoom
Supported by Seoul Foundation for Arts & Culture

“난 잘 모르겠습니다”

토기장이는, 소리가 탁한 도기는 깬다.

30년의 허물을 벗는다.

탈피(脫皮)는, 고치를 버리고 나비로 새 생명을 얻는 누에와 닮았다.

거죽을 벗고, 알을 깨어나가는 데는 죽음과 비슷한 산고(産苦)가 따른다.

작가가 작품을 깨는 것은 그에 견줄 만한 시련이 따른다.

그러나 다른 차원의 세계로 날갯짓이 시작되려면, 허물과 거죽의 삶이 끝나야 한다… 

– 작가노트(2018) 중

디스위켄드룸에서는 10월 3일부터 10월 12일까지 류승환 개인전 <강을 건너고 나면, 뗏목을 버려라>를 진행한다. 류승환은 10m의 긴 두루마리에 0.3mm의 가는 펜을 이용하여 30여 년 동안 매일 10cm씩 세밀한 선(禪)적인 그림을 그려왔다. 삶과 죽음, 신화, 무의식 등 철학적 상념이 기록된 두루마리는 현재까지 수십 개에 다다른다.

그러나 이번 전시를 앞두고 류승환은 지금까지 그려온 드로잉들을 모두 꺼내어 그중 절반가량을 스스로 파기했다. 파기된 드로잉 조각은 자연의 오브제들과 함께 변태(變態) 과정을 거쳐 전시 종료 후 소멸된다. 9월 한 달간 디스위켄드룸 공간에 머물며 화가로서의 자각과 실천을 단호하게 거듭한 작가는 이번 전시를 통해 소멸에서 소생을 시도하며, 새로운 작업 방향을 제시한다. 전시 제목 ‘강을 건너고 나면, 뗏목을 버려라’는 금강경에서 발췌한 구절로 작가의 실존적 의지를 대변한다. 전시는 휴무일 없이 오후 1시부터 7시까지, 열흘간 진행된다.

about Artist

류승환(b.1961)은 서울대학교 회화과를 졸업한 뒤 서울과 베를린을 오가며 작업중이다. 1991년부터 종이 위에 가는 펜으로 어떤 대상을 그리는 것이 아닌, 의식과 무의식의 흐름, 세계가 작동하는 방식을 재현하는 선(禪) 적인 드로잉을 그려왔다. 주요 개인전으로는 <솟음>(Galerie Heba, Berlin, 2014), <그림 꿈을 꾸다>(포스코미술관, 서울, 2013), <선선색선>(터치아트갤러리, 파주, 2009), <IntoDrawing>(소마미술관, 서울, 2007) 등이 있으며, <Project ON#1-Sphere,주독일대한민국대사관 한국문화원, 베를린, 2017), <지속>(우민아트센터, 청주, 2016), <InsideDrawing(일우스페이스, 서울, 2016, <Exposition-LeFortduVert,Wambrechies, 파리, 2014) 등의 단체전에 참여했다.

소멸, 에너지 보존의 법칙

글/ 고연수(평론)

“죽음은 그것을 생각하는 인간에게 지금 눈앞에 있는 상황 속에서 언제나 완전무결한 것을 선택하도록 한다. 그것이야말로 필요한 것이다. 정신에는 죽음이 없다. 따라서 정신에 의해 사는 사람은 죽음으로부터 자유롭다” -2002년 작업 노트 중에-

작가 류승환의 수 십 권의 작업노트들 안에 수를 놓듯 그려진 글자들의 행렬은 오른쪽 하단으로 조금씩 밀리면서도 오밀조밀 서로를 붙들고 있다. 그려진 글자들과 중간에 삽화를 해독하는 일은 다락에서 발견된 고서를 들쳐보는 듯 신비한 느낌이다. 내용은 일상적인 생각들로부터 작가가 습득한 여러 철학들에 대한 것들로 가득 차 있다.

수집하는 노마드

작업노트들에는 작가의 소소한 일상부터 옛 성인과 철학자들을 소환해 마치 회담하는 식의 내용으로 채워졌다면, 드로잉 작품들은 0.3밀리미터의 가는 펜으로 빼곡히 그려져 작가가 꿈꾸는 공상의 나래를 펼쳐준다. 지난 30여 년을 고수해 온 펜화 작업은 일기처럼 하루에 10센티미터씩 꼬박 기록되었고, 하루에 한 프레임을 마치면 마치 의식처럼 정확히 그 폭만큼 두루마리로 굽이굽이 말려진다. 이러한 작업 방식은 과거에 예상치 못한 작품 손실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기 때문이다. 젊었기에 무거워도 행복했던, 무던히도 반짝이는 청춘을 진솔하게 욱여넣었던 작품들을 잃어버린 후 캔버스는 종이로, 페인팅이 아닌 드로잉으로 전환되었다. 작업을 위한 거창한 반경 대신 최소한의 안락한 공간만을 확보해 스스로를 고립시켜 가는 펜으로 선을 집약시킨 작업이 지금까지 이어져왔다.

작가 류승환의 수평적 드로잉 작업들은 질 들뢰즈Gilles Deleuze의 ‘리좀Rhyzome‘ 사유 방식과 흡사하다. 큰 줄기를 중심으로 잔가지가 뻗어나가는 기존의 안정적인 방식에 반해 리좀은 줄기가 땅속으로 파고들어 줄기와 뿌리의 모호해진 상태의 망과 같은 네트워크 형식을 뜻한다. 이분법적인 사고방식을 떠나 중심이 없기 때문에 사유의 자유로운 배열과 호환은 무엇이든 상상 그 이상으로 뻗어나갈 수 있으며, 작가의 수평적 드로잉은 이러한 형식으로 흐름을 이어온 듯 보인다. 작가는 지난 6년간 버려지고 곧 폐기될 듯한 자연물들을 채집해왔고, 중심이 상실된 노마드적 드로잉에 중간중간 수집물을 병치시키는 작업을 병행했다. 수집된 오브제는 드로잉 작업 안에 마치 둥지처럼 똬리를 틀어 작가는 상당 부분 오브제에 기대어 심리적 안정감을 느껴온 것 같다.

작업의 형식도 이러하지만 실제 작가가 지향하는 예술적 실천도 비슷하다. 작품 손실의 충격으로 핸들링이 어려운 형태는 과감히 버리고 당장 옆구리에 끼고 떠날 수 있는 두루마리 형태의 작업으로 바꾼 것이다. 게다가 본인의 작품을 보관하거나 다루는 태도는 일본 에도江戶시대 우키요에浮世絵만큼이나 유연(?)하고 관대하게 보일 정도다. 작업의 형식과 철학적 상념의 기록이 노마드적이나 한편 드로잉과 함께 버무려졌던 오브제들은 작가의 세계로 소환되어 새로운 보금자리에서 생을 이어왔다. 작가는 물질적 소유의 욕망은 전무한 대신 쓸모가 다해져 버려진 자연물들에 대한 소유의 욕망은 커져 그의 작업(실)으로 박제해버렸다. 맥락 없이 선택되어진 오브제들은 리좀 형식의 작가 류승환의 드로잉과 자연스레 어울리며 지금까지 작가에게 최상의 쓸모 있는 오브제로 생을 같이 해 온 것이다.

화장火葬되기 위한 화장化粧

시각예술의 역사를 개괄해 훑어보면 시대마다 일종의 트렌드처럼 집중되는 이슈나 주제 그리고 담론들이 있다. 오롯이 창작물을 생산해 내는 창작자들의 권한으로 그들의 작업이 결정된다. 하지만 창작자를 둘러싼 여러 환경들의 생성과 변화는 분명 다시 창작자의 창작활동에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현대에는 거대담론(정치∙사회∙지역적 이슈나 예술 본질 등에 대한)을 창작자 본인의 이야기로 끌어들이는 경우와 그 반대의 경우가 많이 목도된다. 스스로 소화하기 버거운 거대한 담론일지라도 소통과 공감을 얻고자 하는 창작자의 소박한 욕심에서, 작업이 노출되는 무대가 깊고 넓어짐에 따라 작업 역시 어떤 식으로든 커져야 한다는 심리적 부담도 작용할 것이다. 그리고 거대해 보이는 세상이 한 명의 창작자에 의해 신비롭게 완벽히 컨트롤 된 시각적 형상을 우리는 계속 기대를 한다. 흐릿한 개연성의 약점을 타고난 감각과 세련된 자신의 조형언어로 잘 연출하여 설득하는 작업들, 확고하고 명확한 연결고리를 만들어 힘 있게 발화시키는 작품들도 많이 접할 수 있다. 반면 본인의 사변적 이야기를 거대담론으로 확장시키는 경우도 있는데 이는 자칫 더 어려운 일일 수 있다. 확장시키려는 욕망으로 무던히 노력해야 하는 힘이 딸리는(이런 경우 조용한 독백 어조로 마무리된다) 작품이나, 어색한 연결인데 여하튼 확장되어 보이는 경우에도 예술적이어야 하는 당위가 고스란히 작품을 마주한 관객에게 부담으로 떠넘겨져 억지로서 짓누르기 일쑤다. 좀 더 솔직해지자면, 이런저런 인위적 노력 없이도 힘 있는 좋은 작업은 애초에 강하게 넘치고 흘러 번져나가는 것이고, 오히려 새로운 거대한 담론을 생성하기도 한다.

이러한 분류에서 작가 류승환의 작업은 후자라 볼 수 있는데, 다만 그 연결이 탄탄하다 못해 얽히고설켜 뭉쳐져 고착돼 있을 정도다. 작가 본인의 일상부터 예술에 대한 생각들, 치밀하게 성실히 연구된 상념들, 끝없는 몽상, 그리고 자발적 고독까지 완벽히 장착되어 얽혀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시간성까지 보태어 더욱 끈끈해진다. 현대에는 작가 류승환의 드로잉 작품과 비슷한 형식들을 심심치 않게 발견할 수 있지만, 확연히 구별되는 지점도 바로 이 시간성과 빈틈없이 착실하게 축적된 작가의 상념들이다. 작가 류승환의 드로잉을 고유하게 만드는 부분이기도 하다. 그런데 작가가 그간 꾸려온 그만의 (작업)생태계와 안락한 안전장치를 스스로 파기하고자 하는 시도가 이번 전시에서 보인다. 화장火葬시키기 위해 그간의 작품들을 가장 최후의 아름다운 모습으로 화장化粧시키는 작업을 진행해 화두를 남기고 있다. 쌓여지고 배열되어 흐른 시간은 작가 스스로 마감하고자 파기하며 이는 오히려 거대한 담론보다도 묵직한 에너지로 치환되는 과정인 것이다.

파쇄, 새롭게 점지되는 중심

이번 전시에서는 그동안 진행되었던 가로 수평의 드로잉 작업들과 수집된 오브제를 함께 화장化粧했다. 2013년, 드로잉에 오브제를 넣어 볼륨을 더한 작업을 개인전을 통해 보였지만 이번 전시에서 이들은 철저히 소멸되기 위해 단장된 작품이라는 점이 맥락을 달리한다. 작품의 파기는 실제 가시적인 매체를 파기시킨다는 의미도 있지만 무엇보다 작가가 품은 의미는 좀 더 깊은 곳에 있다. 작품을 소멸시킨다는 것과 동시에 그간 해왔던 작업 방식과 태도에 대한 마감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작가는 성실히 시간을 쌓아오며 작업에 임했지만 여전히 인간으로서의 실질적인 삶과 예술가로서의 삶이 상충되는 지점에서, 그리고 독일과 한국을 적당히 오가며 일상과 예술을 저울질 한 점 등을 고백한다. 여기에 더불어 노마드적인 작업과 태도에 반해 열심히 오브제를 수집해 온 그의 행위는 한껏 자유롭고 싶지만 심리적 안정감을 찾으려 지속적으로 조율해 온 정신을 대변해 주는 것은 아닐까. 이러한 적절한 줄타기와 같은 마음을 정리하고 싶은 작가의 다짐이 이번전시에서는 더욱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실제 수년간의 유목 생활-그가 그렇게 다루었기 때문에-로 무척 지쳐 보이는 작품들이 적지 않아 보인다. 이러한 작품들에 실제 이별을 고하는 시도라 볼 수 있다.

일차적으로는 작품이 물질로서 파쇄되고 연소되는 것이지만 이 안에 담긴 에너지는 그대로 남아 다른 형태로 생성되어질 것임은 자명하다. 다른 형태를 입기 위한 파쇄이긴 하지만 존재를 입증해왔던 증거를 소멸시킨다는 것은 자칫 존재마저 부정될 수도 있다는, 작가에게는 작품을 자신의 손으로 마음에 묻어야 하는 어려운 작업이었음을 깊이 통감할 수 있다.

긴 터널과 같았던 가로의 서사적 흐름을 마치고 작가 류승환에 의해 점지되는 곳이 곧 중심이 되어 확장되는 작업 형식으로의 변화, 즉 소멸과 생성을 이번 전시에서 작가가 선언하고 있다. 노마드적 맥락으로서의 서사적 힘을 끊은 에너지는 또 다른 곳에서 무수히 번져나갈 듯 보인다. 중심이 없다는 것은 역설적으로는 그 어디든 작가에 의해 중심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또한 의미하기 때문이다.

태양만이 흑점을 지닐 권리가 있다 -괴테-

보후밀 흐라발Bohumill Hrabal의 소설 『너무 시끄러운 고독』 속 주인공 한탸는 버려지는 폐지를 압축하는 일을 한다. 더러워진 폐지 속에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고귀한 철학들을 습득하는 한탸는 자신의 몸에도 교양이 압축된다. 맥주를 마시며 예수와 노자와 대담을 나누고, 눅눅한 지하방에서 은신처를 두고 생쥐와의 신경전에서조차 쇼펜하우어와 헤겔의 긴장감 있는 이론적 대립을 연상한다. 그의 온전한 러브스토리이자 전부였던 폐지 압축 일을 더는 할 수 없게 되자 폐지들 속에서 반짝였던 모든 것들과 운명을 함께 하기로 한다. 그 직전 세상을 바라보던 주인공의 시선은 더없이 세심하고 영민하며 따듯한데, 물놀이하는 아이들의 배에 난 팬티 고무줄 자국에서 유대인들의 허리띠 개념과 가톨릭 신부들의 로만칼라의 표징을 생각한다.

이번 전시를 위해 작가 류승환은 한 달여 동안 전시공간에 체류하며 그간의 작업들을 차곡차곡 정리하였다. 자신과 동일시된 작품들의 생의 마감을 앞두고 가장 완전무결한 마음(작가노트에 적힌 대로)으로 작가 자신을 정리하는 시간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어느  때보다 자신의 작품에 가장 따듯하고 다정한 시선을 남겼음에도 틀림없다. 작가 류승환은 자신의 작업을 스스로 화장(火葬, 化粧) 함으로써 지난 최대한 가벼운 몸으로 작가와 늘 함께 움직여왔던 자신의 작품과 작업에-그리고 축적된 시간에-대한 오마주를 표하고 있다. 화장된 작업의 에너지는 압축되어 신작들로 변환되는 과정, 파편화된 에너지는 또 다른 곳에 중심이 되어 발열되고 확산해 번져나가는 그 시작을 이번 전시를 통해 보여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