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I.P 고요한 기억

김기범 박동균 박예나 임노식 최모민

황대원 기획

2018.11.22(목)-12.22(목)/ 11am-7pm *월요일 closed

디스위켄드룸(강남구 청담동 131-2, 2층)

© 2018 인앤아웃
이 전시는 서울문화재단의 청년예술공간지원사업을 통해 매칭된 지원 전시입니다.

〈R. I. P. – 고요한 기억〉은 미술이 우리 사회의 ‘장례 문화’와의 만남을 통해 현대인의 삶에 기여할 수 있는 가능성을 실험하는 프로젝트다. 이는 2018년 1월부터 인앤아웃(김기범, 박동균, 박예나, 임노식, 최모민, 황대원)에 의해 기획되었고, 2018년 5월에 서울문화재단의 청년예술지원사업 ‘서울청년예술단’에 선정되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이번 프로젝트에서 작가들은 각자 친분이 없는 한 사람의 의뢰를 받아, 그 사람에게 소중한 존재였던 고인(故人)에 대한 기억을 담는 작품을 제작했다. 작가와 의뢰인은 이런 작업을 위해 수차례 면담을 갖고 서신을 교환하며 고인에 대한 기억을 공유하고 구체화하는 과정을 거쳤다. 2018년 11월 22일부터 한 달 동안 디스위켄드룸에서 열리는 전시, 〈R. I. P. – 고요한 기억〉을 통해 그동안의 과정의 산물인 작품들을 공개한다. 전시가 끝난 후에 작품들 각각은 의뢰인에게 증정될 것이다.

누군가의 삶에서 고인을 잊지 못할 그리운 존재로 만드는 어떤 것이 있다면, 그것은 고인의 삶의 한 의미를 조용히 증언한다. 죽음은 슬프고 괴로워서 외면하고 싶은 것이기도 하지만, 또한 한 인간의 삶을 마무리하고 그 의미를 돌아보게 하는 사건이기도 하다. 이번 전시의 작품들은 의뢰인의 삶에 자리한 ‘어떤 것’을 감각적으로 구현한다. 작가와의 면담에서 의뢰인들이 주로 이야기한 것은 고인의 사회적 업적이나 경력이 아니었다. 이런 것들을 기록하는 데는 예술이 굳이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의뢰인들의 기억은 평범한 삶 속에서 흘러간 크고 작은 일들, 가까운 사람만 아는 습관들, 의식하지 못한 채 조금씩 쌓인 감각과 감정들이 서로 얽힌 모습으로 재생되었다. 이는 즐거운 추억일 수도 있고 지워지지 않는 슬픔이나 후회일 수도 있으며, 가슴에 박혀 여전히 선명한 감각일 수도 있고 다른 기억들과 뒤섞여 희미하고 모호해진 것일 수도 있다. 이런 설명하기 힘든 기억에 가만히 귀를 기울이고, 그 속에서 드러나는 한 사람의 존재감을 간단히 요약하지 않으며 표현하는 것은 아마 예술만이 할 수 있는 일일 것이다.

작가들은 의뢰인과의 대화 속에서 여러 단편적 기억들을 연결하는 어떤 사물이나 풍경, 또는 은유적 이미지를 발견했다. 그들은 이런 것들을 주제로 작품을 제작하되, 그것들을 단순히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주제가 담아내는 기억(을 이루는 감각과 감정, 경험들)의 깊이와 단순하지 않은 문양을 표현하려 했다. 〈R. I. P.– 고요한 기억〉은 작가들 각자의 서로 다른 매체와 예술적 의도를 바탕으로 제작된, 한 인간의 삶에 대한 기념비의 다양한 형식을 제시한다. 이 고요한 기억의 형상들은 우선 고인과 의뢰인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지만, 바라건대 다른 관객들도 공감할 수 있는 작품일 것이다. 만약 그럴 수 있다면, 이는 작품들이 어떤 역사적, 사회적 담론을 암시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들이 담는 개인적 기억의 표현들 속에서 우리 각자의 이야기가 예기치 못한 방식으로 서로 이어지기 때문일 것이다.

이 전시가 보여 주는 작품들은 엄밀히 말하면 장례보다 제례에 가까운 성격을 갖는다. 다시 말해, 그것들은 장례식을 위해 제작된 것이 아니라, 긴 시간이 흐른 뒤에 남겨진 고인에 대한 기억을 담는 작품이다. 그러나 이 사실이 장례 문화에 대한 기여라는 이번 프로젝트의 취지에 어긋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오늘날 장례 문화는 점차 간소화되고 있으며, 그럴수록 한 인간의 삶과 죽음을 돌아보는 일은 제례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전통적 제사 문화가 시대와 함께 변화하지 못하고 사라져 가는 것 또한 우리 사회의 현실이다. 고인의 삶의 의미를 기억하는 의식은 어떤 방법으로 지속될 수 있을까. 이 전시가 예시하려 한 것처럼, 어쩌면 미술이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작품 소개

김기범, <차가운 입김>, 싱글채널 영상, 5분 10초, 2018

그녀는 십여 년 전에 언니를 잃고, 여전히 스러지지 않는 깊은 상실감을 안고 살아왔다. 김기범은 타인의 이런 아픔을 작품으로 옮기는 일의 무게를 실감하고, 그러면서도 의뢰인의 이야기에 몰입하며 이 영상을 제작했다.

그는 고인에 대한 기억의 한 부분을 담기보다, 고인을 그리며 살아가는 의뢰인의 모습과 감정에 더 주의를 기울이는 작업을 선택했다. 이는 작가가 의뢰인과의 만남에서 과거의 기억보다 현재의 감정에 조금 더 깊이 몰입했고, 그녀에게 조금이라도 의미 있는 작품을 주고 싶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녀와 작가는 고인을 기억하게 하는 것들은 너무 많고 어디에나 있으며, 그중 몇 가지를 작업의 소재로 선택하는 것은 어렵고 또 무의미한 일이라는 데 동의했다. 그 대신, 김기범은 일상 속에서 문득문득 그녀를 사로잡는 언니에 대한 그리움을 표현하는 두 가지 말에 주목했다. 차가운 입김, 그리고 ‘현실과 그리움의 틈 속에서 살아간다’는 말. 시처럼 간결한 문장으로 된 <차가운 입김>의 자막은 ‘하’와 ‘후’를 대비한다. 미묘한 차이가 있는 두 의성어 중에서 전자가 의뢰인의 한숨을 뜻한다면, 후자는 마치 고인의 입김처럼 느껴지곤 하는 차가운 바람을 가리킨다. <차가운 입김>은 이런 은유적 표현들을 중심으로 글과 이미지와 소리를 엮어 서정적 아름다움을 빚어낸다. 가령, 숨결에 대한 말은 바람이 부는 풍경들과 금세 이어지며 그 속에 녹아든다.

다른 한편, 장면들 사이의 건조하고 급격한 전환이나 고요한 풍경을 찢고 들어오는 일상의 소음처럼, 이 영상은 서정적 흐름을 방해하는 많은 불편한 표현들도 담아낸다. 이런 단절의 감각들은 무슨 충격을 의도하는 것은 아니지만, 생각과 풍경들을 서로 어긋나게 하며 그것들 사이에 작지만 외면하기 힘든 틈을 만든다. 이 틈은 자막이 전하는 이야기에 대한 공감을 막는 장애물로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러나 이는 그리움의 자리이며, 차가운 바람이 불어 들어오는 틈이기도 하다.

김기범은 외견상 서로 이질적인 의미나 기능을 갖는 사물들을 절묘하게 연결하되, 그 속에서 여전히 사라지지 않는 간극을 역설적으로 드러내는 설치와 영상 작업들을 해 왔다. 가령, 그의 〈낭독방〉(2013)은 노래방 기계의 형식을 빌려, 서정시를 조용히 낭독할 수 있는 기능을 부여한 작업이다. 이번 전시에서 그의 〈차가운 입김〉(2018)은 자막과 화면, 소리라는 세 요소의 조화와 단절에 의해 서정적 아름다움과 불편한 간극을 함께 표현한다. 또한 이런 영상을 통해 그는 한 사람의 내밀한 정서의 풍경을 담아내는 법을 찾으려 했다. 김기범은 〈편력〉(2014)과 〈비디오 릴레이 탄산〉(2016) 등의 전시에 참여했고, 최근에는 영상 작업에 집중하고 있다.
박동균, 〈Mille Feux〉, 아카이벌 피그먼트 프린트, 75.6 x 50.4cm, 2018

그녀의 마음 한구석에는 늘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셨을 때 장례식을 마땅히 치르지 못한 것이 아쉽고 죄송스러운 마음이 있었다. 그녀는 작가에게 할아버지를 기억할 수 있는 기념비를 만들어 달라고 부탁했다.

박동균은 의뢰인이 고인에 대한 그리움을 오랫동안 간직할 수 있게 해 주는 작품을 제작하길 바랐다. 작가는 의뢰인으로 하여금 고인을 떠올리게 하는 두 가지 사물에 주목했다. 하나는 고인이 생전에 즐겨 피우던 담배이며, 이는 그녀의 곁에 있었던 할아버지에 대한 추억들을 여전히 생생하게 불러일으킨다.

다른 하나는 절에서 지내는 고인의 제사이며, 이는 그녀를 세상을 떠난 할아버지와 이어 주는 특별한 경험이자 통로였다. 의뢰인과의 대화가 조금 더 깊어지면서, 박동균은 그녀의 기억이 말로 설명할 수 있는 구체적 일화보다는, 저런 사물들이 만들어 내는 연기와 냄새, 혹은 분위기에 의존하는 감각적 이미지에 더 가깝다는 것을 알았다. 물레 위에서 돌아가는 향로를 긴 호흡으로 촬영하고, 다시 그렇게 찍은 여러 겹의 사진들을 포개어 제작한 〈Mille Feux〉는 일견 SF의 한 장면 같은 분위기를 자아낸다. 이 사진에 담긴 제기(祭器)는 그것이 일상 속에서, 혹은 작가와 의뢰인이 공유한 기억 속에서 갖는 기능과 의미에서 반쯤 일탈한다. 이미지에 의해, 고인에 대한 기억이 거처하고 또한 감각적으로 확장될 수 있는 공간들을 열어 놓는다.

다른 한편, 시간의 흔적이 매끄럽게 압축된 향로의 표면과 그 위에 새겨진 한 줄기의 푸른 빛, 금속의 회전이 빚어내는 원환과 작은 불꽃놀이처럼 치솟는 향의 모습은 의뢰인이 살아온 과거와 현재의 현실에서 벗어난 상상들을 불러온다. 〈Mille Feux〉는 이런 미적 표현들과 제기에 함축된 감각적 경험들이 교차하는 이미지에 의해, 고인에 대한 기억이 거처하고 또한 감각적으로 확장될 수 있는 공간들을 열어 놓는다.

박동균의 사진은 새로운 과학 기술이나 소비문화와 같은 동시대의 문화적 조건들과 연관성이 깊은 사물에 주목한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이런 조건에 단순히 종속되지 않는 사물의 물질성을 부각하며, 이로써 또 하나의 감각적 세계를 발견, 제시하는 작업을 추구해 왔다. 이번 전시에서 그의 〈Mille Feux〉(2018)는 향로라는 사물을 사진 이미지에 담는 독특한 기법으로, 한 사람의 소중한 기억과 연결되는 동시에 이를 벗어나 확장되는 감각적 형상을 보여 준다. 박동균은 2017 미래작가상을 수상했고, 〈물질 몽타주〉(2018)와 〈더 스크랩〉(2018) 등의 전시에 참여했으며, 최근에는 광고를 위한 제품 사진의 형식을 탐구하는 작업에 관심이 있다.
(좌) 박예나, 〈타닥타닥〉, 합판, 목재, 선풍기, 고무, 라드와 숯 등이 함유된 혼합 가루, 84 x 58 x 74cm, 2018 (우) 박예나, 〈어둠 자국〉, 고무, 흡음재, 모터, 205 x 155 x 5cm, 2018

그는 10년 전에 돌아가신 할아버지에 대한 기억을 담는 작품을 부탁했다. 의뢰인이 작가에게 들려준 이야기에 의하면, 고인은 시골에서 농사를 짓던 근면하고 단단한 사람으로, 그를 많이 혼내기도 했던 엄하고 무뚝뚝한 할아버지였다. 솔직히 그는 할아버지와 친밀한 관계보다는 오히려 데면데면한 사이였고, 그래서인지 10년이 흐른 지금 고인에 대한 그의 기억은 많은 부분 모호하고 흐릿해져 있었다. 그럼에도 그는 시간이 지날수록 할아버지에 대한 기억들이 마음을 사로잡는다고 말했다.

박예나는 의뢰인과의 대화 속에서 크게 두 가지 기억에 주목했다. 가만히 있다가 가끔 파드닥 움직이는 〈타닥타닥〉은 시골집 마당에서 할아버지와 함께 돼지 껍데기를 구워 먹었던 의뢰인의 추억을 담는다. 파란색 비닐봉지에 담아 온 껍데기를 구울 때, 마당에 퍼지던 구수한 냄새와 타닥타닥 튀는 소리, 그리고 따듯하고 평화로운 분위기. 〈타닥타닥〉은 이 추억에서 몇몇 주된 요소들을 추출해 설치 작업으로 재구성하고, 거기 더해진 발랄한 움직임에 의해 당시의 즐거운 기분을 희극적으로 부각한다. 한편, 검은 고무로 된 이불 형상의 〈어둠 자국〉은 시골집에 갔을 때 할아버지, 할머니와 이른 저녁에 잠자리에 들어야 했던 의뢰인의 기억을 담는다. 캄캄한 어둠, 불편한 뒤척임, 뜬눈으로 느끼던 이불의 무게와 촉감, 쿰쿰한 냄새와 침묵을 깨는 수상한 소리들. 〈어둠 자국〉에는 많은 아이러니가 있다. 그때의 밤은 의뢰인에게 괴로운 시간이었고, 이 작업이 표현하는 그런 기억은 소박한 비유로 인해 다소 농담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이제 그 밤은 그리움의 대상이며, 이 작업이 기억하는 할아버지의 존재감은 가볍지 않다.

박예나는 설치 미술을 중심으로, 이름 붙이기 힘든 감정처럼 실체가 모호한 것들을 물질적으로 구현하는 예술을 추구해 왔다. 그녀의 설치 작업들은 종종 기계 장치를 포함하며, 이로써 어떤 예상치 못한 독특한 움직임을 만들어 내면서 미묘한 생명감을 자아낸다. 이번 전시에서 그녀의 〈타닥타닥〉(2018)과 〈어둠 자국〉(2018)은 각각 한 사람의 즐겁거나 힘들었던 추억을 담아낸다. 그녀는 이런 추억의 정경에서 시각과 청각, 후각, 촉각의 요소들을 추출해 설치 작업으로 재구성하고, 이에 더해진 움직임에 의해 옛 정경의 분위기를 되살린다. 박예나는 〈제3의 과제전〉(2017)에 참여했으며, 또한 개인전 〈이탈을 위한 움직임〉(2017)을 열었다.
임노식, 〈Daybreak〉, 캔버스에 유채, 가변 크기, 2018

그녀는 돌아가신 어머니에 대한 기억을 떠올려 보았다. 임노식은 의뢰인을 여러 차례 방문하여, 그녀가 어린 시절부터 50대까지 살아온 긴 이야기와 함께 고인에 대한 기억들을 전해 들었다. 그녀는 지난날 어머니와 다정하게 지내지 못했고, 작가에게 좋은 추억보다 주로 섭섭하거나 미안했던 일들에 대한 이야기를, 그리고 지금 돌이켜 보면 어머니께 더 잘해 드리지 못한 것이 후회된다는 말을 많이 했다. 임노식은 이런 이야기를 마음에 새겨 두면서도, 그녀의 후회를 그대로 담기보다 조금 더 밝고 미력하나마 위안이 되는 작품을 만들고 싶었다.

그는 창문, 새벽, 꽃, 그림자, 하늘이라는 다섯 개의 소재를 선택했다. 창문과 새벽은 의뢰인이 들려준, 새벽에 창 밖에서 정안수를 떠 놓고 기도를 드리던 고인에 대한 기억에서 가져온 것이다. 꽃과 하늘과 그림자는 의뢰인이 결혼 전에 고인과 함께 살았던 곳의 주소지를 찾아갔을 때, 작가가 그곳 풍경에서 자신의 눈길을 사로잡은 것들을 단서로 정한 것이다. 작은 20점의 회화로 구성된 〈Daybreak〉는 일견 서로 무관한 듯한 창문과 새벽, 꽃과 그림자와 하늘을 보여 준다. 그중 일부는 작가가 찾아간 곳의 풍경에서 온 것이고, 다른 일부는 그가 들은 의뢰인의 기억의 몇몇 부분을 표현하며, 또 다른 일부는 그런 기억을 바탕으로 상상해서 그린 관념적 이미지다. 작가는 이런 그림 200점을 쉬지 않고 그린 다음에, 그중 20점을 선정해서 이 작업을 완성했다. 작은 그림들 각각은 고인에 대한 기억의 단편들, 의뢰인의 마음 속 후회와 그리움, 또는 작가가 마치 제사상에 고기를 올리듯 고인에게 선물한 여행과 같은 여러 가지 의미를 담지만, 희미해진 기억처럼 들릴 듯 말 듯 속삭이며 그렇게 한다. 작가 특유의 회화 표면과 다섯 가지 소재라는 가느다란 실에 의해서, 〈Daybreak〉는 서로 출처가 다른 이런 단편적 이미지들을 엮어 하나의 풍경으로 만든다.

임노식의 회화는 그가 태어나고 자란 시골이나, 작업실 근처에서 자주 다니는 산책로와 같이 그의 삶과 밀접한 풍경들을 담아 왔다. 그는 매일 반복되며 무감각해진 풍경 속에서, 어떤 경이(驚異)가 느껴지는 장면을 찾아 화폭에 옮긴다. 이번 전시에서 그의 〈Daybreak〉(2018)는 여전히 풍경을 그리되, 전과 달리 외견상 서로 무관한 여러 단편적 이미지를 연결하면서 그렇게 한다. 이 작업은 실제 풍경, 한 사람의 소중한 기억, 그리고 상상의 풍경들의 느슨한 관계 속에서 시작과 끝이 없는 많은 이야기를 담으려 한다. 임노식은 OCI미술관에서 열린 〈안에서 본 풍경〉(2016), 합정지구에서 열린 〈Folded Time〉(2017) 등 2회의 개인전을 가졌다.
(좌측부터) 최모민, 〈After Blue 1〉, 캔버스에 유채, 90.5 x 65cm, 2018, 〈After Blue 2〉, 캔버스에 유채, 117 x 90.5cm, 2018, 〈After Blue 3〉, 캔버스에 유채, 117 x 90.5cm, 2018

그녀는 이른 나이에 갑자기 세상을 떠난 친구에게 작별 인사를 못한 것이 오랫동안 마음에 걸리고 미안했다. 그들은 둘이서 등굣길과 하굣길을 함께 다니던 사이였다. 최모민은 의뢰인과 대화와 글로 소통하며 그녀의 마음에 가능한 한 공감하려 했고, 한번은 대구에 있는 그녀의 모교를 함께 찾아가 근처를 걸으며 옛 추억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그는 의뢰인이 기억하는 고인의 모습을 되도록 닮은 그림을 그리고 싶었다. 그녀의 추억 중에서 그에게 특히 인상 깊었던 것은 귀갓길에 대한 이야기였다. 밤 9시가 넘어 야자를 마치고, 차분하고 따듯한 성격인 친구와 함께 집으로 가는 길을 그녀는 좋아했다. 집에 거의 다 와서 인사하고 헤어질 때, 친구네 집 쪽의 골목은 특히 어두워서, 웃으면서 손을 흔들고 돌아서는 친구의 모습은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것처럼 보이곤 했다. 최모민은 이 장면을 그리기로 마음먹었지만, 어둠은 그림에서 조금 밀어내기로 했다. 푸른 색조로 구성된 〈After Blue〉 연작은 교복을 입은 소녀의 뒷모습이 있는 풍경을 보여 준다. 작가는 그가 직접 볼 수 없었던 의뢰인의 추억 속 장면의 이상적인 표현을 찾기 위해, 소녀의 모습이나 풍경의 뉘앙스가 서로 조금씩 다른 세 장의 회화를 제작했다. 소녀가 입은 춘추복과 무성한 초록색 나뭇잎을 보면, 그림 속의 계절은 늦봄에서 초여름으로 가는 어디쯤이다. 〈After Blue〉는 해가 진 밤 9시경의 풍경을 담지만, 어둠을 걷고 그것에 덮여 있던 푸른 기운들을 드러낸다. 눈처럼 도처에 쌓인 푸른 색조는 아마 초여름 밤의 선선한 바람이거나, 멀리서부터 밝아 오는 새벽의 푸르스름한 빛이거나, 혹은 아직 여운이 가시지 않은 늦봄의 라일락 향기다. 이런 색들을 화폭에 남기는 차분하고 부드러운 붓 자국은 길이나 공기뿐 아니라 소녀의 옷과 신발로도 이어진다. 의뢰인의 기억에서 나온 그녀는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대신 푸른색 풍경 속으로 녹아든다.

최모민은 도시의 어느 특정한 장소를 담고, 종종 그 속에 있는 익명의 인물을 보여 주며, 이로써 어떤 사회적 징후를 담는 회화를 그린다. 또한 그의 회화가 나타내는 풍경은 소설의 한 장면처럼 작가의 경험과 허구가 섞인 많은 이야기를 암시하곤 한다. 이번 전시에서 그의 〈After Blue〉(2018)는 평소와 다름없이 푸른 가로수길 풍경에 있는 한 소녀의 뒷모습을 그린다. 그는 이 작업에서 소녀에 대한 한 사람의 추억을 오롯이 화폭에 담으려 하되, 밤 9시경인 추억 속 장면의 어둠을 걷고 푸른 풍경을 드러낸다. 최모민은 개인전 〈익명의 풍경〉(2017)을 열었으며, 2018년 의정부예술의전당 신진작가공모 대상을 수상했고, 현재 금호레지던시에 입주해 있다.